Monday, February 28, 2011

강릉 초당두부 - 고소한 콩과 간간한 바다의 만남

초당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부친 허엽이 한때 이 마을에 살았는데 그의 호 초당에서 따온 마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허엽이 살았던 집이라는 조선시대의 고가도 이 동네에 있다. 이 때문에 초당두부의 기원을 허엽에 두는 이야기가 있다. 허엽이 이 마을에서 처음 바닷물로 두부를 만들었고, 그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가 두부 만드는 '잡일'을 하였을 것이라는 발상은 무리가 있다. 초당동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 두부를 쑤어 시장에 내다파는 집이 한두 집 생겼는데, 전쟁 후 그 수가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가정 경제를 이끌기 위해 아녀자들이 밤새 두부를 만들어 대야에 이고 강릉 시내에 나가 팔았던 것이 차츰 이름을 얻어 지금의 유명세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 맞다.
  • 1  주식회사 강릉초당두부의 두부이다. 공장 두부이기는 하나 초당두부의 역사를 잇고 있는 두부인 것은 맞다.
  • 2  막 끓여낸 순두부이다. 초당동의 두부 식당에서는 보통 이 순두부로 판다. 고운 부드러움이 있다.
  • 3  초당동은 솔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소나무 뒤로 보이는 집은 허엽이 한때 살았다는 조선시대 한옥이다.


끓인 콩물을 굳히는 것들의 전통
두부는 물에 불린 콩을 갈아 콩물을 얻고, 이를 끓여서 굳히는 음식이다.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그 제조법이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끓인 콩물은 마그네슘 또는 칼슘에 반응시켜 두부로 굳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요즘의 두부 제조 공장에서는 순도 높은 마그네슘 또는 칼슘의 응고제를 쓰고 있지만 옛날에는 자연물에서 이를 얻었을 것인데, 바닷물과 황산칼슘을 썼을 것이다. 천일염을 오래 두면 그 아래로 약간 탁한 액체가 빠진다. 이를 간수라 한다. 여기에 마그네슘과 칼슘이 많이 들어 있어 한때는 이 간수를 이용한 두부 제조법이 흔하였다. 간수 응고법을 오랜 전통의 두부 제조법으로 말하고 있으나 천일염 제조법이 일제시대에 전래된 것을 감안하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자연물의 황산칼슘은 광산에서 얻어지는 것이어서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귀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바닷물을 이용한 두부 제조법이 조선시대 때까지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바닷물 그 자체로는 응고력이 떨어지고 운송과 보관에도 힘이 들므로 바닷물을 농축한 함수를 썼을 것이다. 지금도 염전에서 소금으로 굳히기 전 농축된 바닷물, 즉 함수를 퍼다가 두부 응고제로 쓰기는 하는데, 이 함수를 생간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당에서는 바닷물로 두부를 굳힌다
초당두부는 바닷물 그대로를 응고제로 쓴다는 것이 특징이다. 동해의 바닷물, 좁혀서는 강릉 초당의 바닷물은 농축 없이도 콩물을 두부로 굳힐 수 있을 정도로 마그네슘과 칼슘이 많다는 의미이다. 지구의 바닷물은 다 짜지만 그 구성물에는 차이가 있다. 큰 강을 대고 있는 바다나 빙하 근처의 바다는 염도 낮고, 적도 근방의 바다는 물의 증발로 인해 염도가 높다. 우리의 바다도 이 차이를 내는데, 서해와 남해의 바닷물보다 동해의 바닷물이 염도가 높고, 따라서 마그네슘과 칼슘 등의 비중도 높다. 그래서 농축 없이 바닷물 그 자체로 두부가 응고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초당동의 두부 전문 식당들이 쓰는 바닷물은 이를 전문으로 공급하는 회사의 것이다. 바닷가에 파이프를 박아 끌어올리는 바닷물이라고 하는데, 일정의 염도를 맞추어 공급한다고 한다. 초당두부를 대량으로 내는 공장에서도 역시 바닷물을 응고제로 쓰는데 그 염도 등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였다.


넉넉지 못한 마을에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일
초당동 중에서도 두부집이 몰려 있는 쪽은 논밭이 넓지 않다. 바다와 다소 떨어져 있어 어촌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예전부터 넉넉한 동네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마을에서는 인력으로 부가가치를 올리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게 일반적이다. 팔도식후경 캐스트에 이미 소개한원주 황골엿, 양양 송천떡과 같은 일이 이 초당동에서도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외지에서 콩을 사와 두부를 만들어 또 외지에 내다파는 일을 한 것이다. 1951년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토박이에 의하면 그때는 두어 집이 두부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 두부집이 급격히 늘었는데 1954년에 90여 가구가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1983년에는 집에서 두부를 만드는 57명이 모여 초당두부협동조합이 만들어졌으나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주식회사 강릉초당두부'로 바뀌었다. 초당동에 공장이 있으며 슈퍼 등에 초당두부로 팔리고 있는 두부는 이 공장의 것이다.


초당두부는 아침에 맛있다
현재 초당동에는 두부집이 20여 곳에 이른다. 두부를 만들어 내다파는 집은 이제 없으며 모두 식당으로 운영된다. 1970년대에 처음 생긴 변화이다. 원조라 간판을 단 곳이 많지만 초당두부가 유명해지면서 외지인이 들어와 차린 몇 곳 빼고는 다들 토박이들이며 따라서 그 식당들의 역사는 고만고만하다. 제조법은, 바닷물로 응고한다는 점에서는 같고 집집이 콩물을 내며 끓이는 방식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음식을 내는 스타일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흰 순두부만을 고집하는 데도 있고 양념을 더한 전골을 주력으로 하는 데도 있다. 초당두부의 제 맛을 보려면 아침에 가는 것이 좋다. 새벽 4시쯤 콩을 갈기 시작하면 아침 7시쯤이면 두부가 완성된다. 두부는 막 만들었을 때 가장 맛있다. 초당두부는 고소한 콩 향 뒤에 간간한 바다의 향이 묻어난다. 특히 입안에서 스르르 녹는 부드러움은 공장 두부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이다.

양평 분지울작은캠프장 - 작지만 더 바랄 것이 없는 곳

스치기만 해도 베일 듯 바람에 날이 섰습니다. 하얗게 변한 세상을 제 모습으로 되돌리지 않을 것처럼 고집부리는 혹한 속에 양평을 찾았습니다. 강원도 홍천과 맞닿은 양평의 북쪽 자락. 단월면 명성리는 ‘분지울’이라는 고운 우리말 이름을 지녔습니다. 소리산 자락에 둘러싸여 동이처럼 움푹 파인 지형 덕에 생긴 이름입니다. 마을은 홍천 대명비발디파크 입구에 자리했지만 시끌벅적한 분위기 대신 아늑한 고요함을 풍깁니다. 작지만 더 바랄 것이 없는 ‘양평 분지울작은캠프장’으로 조촐하게 캠핑을 떠났습니다.

  • 1  양평 분지울마을에 들어선 분지울작은캠프장. 20팀까지만 예약을 받는 아담한 야영장이다. <이윤정기자>
  • 2  분지울의 겨울 계곡 모습. 분지울은 지형이 움푹 파였다는 뜻이라는데 ‘샘이 솟는 곳’이라는 뜻도 있단다. <이윤정기자>


게을러지라, 한 번도 바쁘지 않았던 것처럼
내비게이션에 ‘양평 단월면 명성리 54-1’번지를 치고 따라갔더니 자꾸 엉뚱한 곳으로 안내합니다. 번지에 ‘산’ 54-1를 찍지 않아서라는군요. 여러 차례 전화로 확인을 거듭하며 어렵사리 야영장을 찾아냈습니다. 눈 쌓인 분지울 마을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서자 아기자기한 팻말이 야영장 입구를 안내합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주황색 돔하우스가 ‘여기부터가 캠핑장입니다’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분지울작은캠프장은 이름에 괜히 ‘작은’이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정말 아담한 야영장이기 때문이죠. 대지 1,500평 규모에 계곡을 끼고 있는 야영장에는 하루 15팀 정도로만 입장이 제한됩니다. 캠핑장지기 장홍익 사장은 2008년 취미 삼아 분지울에 오토캠핑장을 열었습니다. 28년 동안 어린이에게 미술을 가르쳤던 그가 분지울에 터를 잡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장 사장은 “오랜 시간 캠핑을 하면서 ‘반달곰’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어요. 그러면서 선후배들이 편안하게 묵을 수 있는 야영장을 만들겠다 생각하게 된 거죠”라고 말합니다.

장 사장의 사심(?) 가득한 야영장의 모토는 ‘게으르무르’입니다. 쉽게 말해 ‘캠핑을 오면 게을러지라’는 뜻입니다. 돔하우스로 제작된 작업실부터 개수대와 화장실까지 모두 ‘게으르무르’가 적혀 있습니다. 작고 조용한 야영장에서 한 번도 바쁘지 않았던 것처럼 한없이 게을러져 보라는 의도입니다.


밝은 별 아래 샘이 솟는 마을
동이처럼 움푹 파인 지형 덕에 ‘분지울’이라 불리는 명성리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샘이 솟는 마을’이란 뜻입니다. 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실개천은 여름에는 더위를 식혀주고 겨울엔 운치를 자아냅니다. 요즘 분지울 계곡은 마치 ‘얼음땡’ 놀이라도 하듯 꽁꽁 얼어붙었다가 졸졸 노래를 부르며 흐르다가를 반복합니다. 소복이 내린 눈이 그대로 쌓인 계곡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됩니다.

분지울작은캠프장의 또다른 매력은 밤하늘입니다. ‘밝은 별 마을’이라는 뜻의 명성리(明星理)란 이름처럼 분지울의 밤하늘은 행여 쏟아질세라 있는 힘껏 별들을 잡아둡니다. 친구 5명과 함께 캠핑을 온 ID 셀모는 “이곳은 무엇보다 아늑하고 조용해서 좋습니다. 평소에도 15팀으로 입장 제한을 하다 보니 시끌벅적한 적이 없어요. 마음의 나사를 풀고 게으름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름엔 물놀이, 겨울엔 스키·보드
취재간 날 오토캠핑동호회에서 분지울로 릴레이캠핑을 나왔습니다. ID 밤별, 다강, 아띠고을 등의 회원들에게 직접 캠핑장의 매력을 들어봤습니다. 캠핑객들은 분지울 캠핑장에 특A 점수를 흔쾌히 줬습니다. 특히 항상 깨끗하게 관리되는 개수대, 샤워실, 화장실 등 부대시설이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화장실에는 비데까지 설치돼 있을 정도입니다. 마치 캠핑장 호텔에 온 느낌입니다.

주변 환경도 후한 점수의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여름에는 분지울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고 겨울에는 인근 스키장에서 겨울 스포츠를 즐길 수 있습니다. 낮에는 스키·보드를 타고 밤에는 캠핑을 즐기는 캠핑객도 많습니다. 단점으로는 야영장 규모가 작다는 점, 여름에는 그늘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가장 좋은 점은 캠핑장지기의 세심한 배려가 꼽혔습니다. 직접 캠핑을 다니며 캠핑객에게 필요한 시설을 마련한 세심한 손길이 ‘작지만 더 바랄 것이 없는’ 캠핑장을 만든 요인입니다.

흑석동 산책길 - 도심 속 전망 좋은 푸른 길

지하철 9호선 흑석역 4번 출구로 나와서 직진한다. 길 왼쪽 옆 파출소를 지나 좌회전 한 뒤 200m 정도 지나 사거리가 나오면 2시 방향 우회전. 오르막길을 조금 가다 보면 사거리가 또 나오는데 가운데 길로 직진. 또 사거리가 나오면 가운데 길로 직진한다. 오르막길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좁은 골목길 계단 끝까지 올라간다.



산동네 골목 계단 끝에서 펼쳐지는 서울 파노라마

서울에서 몇 곳 안 남은 산비탈 마을 좁은 골목길이 흑석동에도 있다. 푸른색으로 칠한 대문은 녹이 슬고 칠이 벗겨졌다. 물결처럼 굴곡진 슬레이트 지붕 끝에는 고드름이 매달렸다. 귀퉁이가 깨진 시멘트 계단 옆집 감나무 가지가 앙상하다. 전신주에 매달린 전깃줄도 늘어져 힘겨워 보이는 산비탈 골목 계단은 어린 시절 추억이 생각나는 길이다. 다리는 팍팍하고 힘들어도 어린 시절 찐돌이 다방구 하며 뛰어 놀던 코흘리개 친구들 얼굴을 떠올리며 골목 계단을 오른다. 마지막 한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지붕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곳에 서울시에서 선정한 우수 경관 조망 명소 안내판과 함께 긴 나무 의자가 설치 됐다. 안내판 앞에 서면 한강과 남산을 포함한 서울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의자에 짐을 내려놓고 준비해 온 보온 물병을 꺼내 따듯한 물을 따르고 국화차를 우린다. 차 한 잔에 속이 따듯해진다. 풍경이 녹록해 보이고 시간도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다.

계단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서울시에서 우수 경관 조망명소로 선정한 곳이 나온다. 
원효대교 부근에서 매년 가을에 열리는 세계불꽃축제를 보기에도 좋은 곳이다.


잔치국수와 산 위의 운동장
우수 경관 조망 명소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른다.(조망 명소를 바라보며 왼쪽으로 난 길) 조금 가다보면 갈래길이 나오는 데 오른쪽 길로 간다. 바로 이어 계단길과 흙길이 나눠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 흙길을 따라 간다. 그 길을 가다보면 계단이 나오고 계단을 다 내려서면 바로 우회전 한다. 우회전해서 조금만 가다보면 놀이터가 나오는데 놀이터 바로 앞에 왼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으로 내려가서 왼쪽으로 걸어가면 본동사회복지관 건물 바로 앞을 지나게 된다. 복지관 건물 바로 앞을 지나자마자 좌회전해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골목길 끝에 명진슈퍼가 나온다.

명진슈퍼를 끼고 우회전해서 계단으로 내려가 내리막길로 계속 간다. 거의 다 내려가서 정면에 보이는 슈퍼와 피아노학원 사이 골목길로 들어서면 바로 눈앞에 큰 도로가 보인다. 골목길 끝에서 좌회전 하면 ‘소문난국수’집이 나온다. 명진슈퍼에서 약 280미터 정도 거리인데 내려갔다가 다시 명진슈퍼까지 올라와야 한다.

진한 멸치 육수와 매콤한 맛이 곁들여진 잔치국수에 양념장을 얹어 한 그릇을 ‘뚝딱’ 비운다. 다시 명진슈퍼까지 올라간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서 우회전, 옹벽과 아파트 단지 가운데로 난 도로를 따라 간다. 옹벽 아래 인도로 걸어야 한다. 왼쪽 옆에 배드민턴장을 지나서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에 숲으로 빠지는 시멘트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가다 보면 흙길과 계단길이 갈라지는 곳이 나오는데 오른쪽 계단길로 오른다. 조그만 운동장을 지나 건물 왼쪽으로 난 길을 올라가면 운동장이 나온다. 농구 골대도 있고 화장실도 있다. 운동장 끝까지 걸어가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으로 올라가면 운동기구 몇 개 놓인 공터가 나오고 그 위로 그런 공터가 계속 이어진다. 가장 높은 공터까지 올라가서 나무계단(나무계단이 공터 삼면에 나 있다. 두 개는 몇 계단 안 되고 나머지 하나는 계단길이 굽어지며 길게 나있다. 그 계단으로 가야 한다.)을 따라 계속 내려가다가 길을 만나면 우회전 한다. 조금 더 가다 보면 왼쪽으로 계단이 보이는데 그 쪽으로 내려간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도로를 만나게 되는데 거기서 우회전.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도로가 나온다. 도로를 건너 우회전해서 올라가면 중대후문이 나온다. 후문을 지나 길모퉁이 전봇대를 끼고 좌회전 한 뒤 조금만 가다 보면 길이 왼쪽으로 굽어지는데 그 길 따라 간다. 길 왼쪽에 녹색 철책이 이어진다. 길 가에 정자가 있고 그 아래 나무계단이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서달산 자연관찰로’ 안내판이 보이고 그 옆 계단으로 올라가면 서달산 오솔길이 시작된다.

묘비 앞 붉은 꽃이 하얀 눈밭 위에서 더 붉다.


서달산 오솔길과 현충원
서달산 오솔길로 접어들면서부터 이정표가 잘 돼 있다. 잣나무숲길, 자연학습원, 야생초화원 등을 차례로 지난다. 꽃 피는 계절이라면 야생초화원에 갖은 꽃들이 피어 꽃구경을 실컷 하겠다. 야생초화원을 지나면 터널 위에 설치 된 생태다리를 건너 게 된다. ‘피톤치드체험장’과 ‘현충원’ 이정표만 따라가면 된다. 서달산 정상으로 가는 길과 현충원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현충원으로 가는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겨울이지만 상록수 푸른빛과 숲에서 노래하는 새 소리에 오솔길을 걷는 마음이 밝아진다. 간혹 커다란 바위도 나오고 거대한 뿌리를 드러내고 드러누운 나무도 생소하다. 현충원 담장이 보인다. 담장을 왼쪽에 두고 걷다 보면 성황당 돌탑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는 곳을 지난다. 그곳에서 조금만 더 가서 계단을 올라가면 길 왼쪽에 현충원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다. 365일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한다. 현충원 쪽문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른다. 넓은 흙 길 가에 녹색 철책이 쳐 있다. 중간에 ‘지장사’라는 절이 나왔다. 지장사는 670년에 세워진 절이다. 처음에는 화장사라고 불렀다. 1550년에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 씨 묘를 이곳에 두면서 ‘능’이나 ‘원’에 속하여 나라 제사에 쓰는 두부를 만들던 절인 ‘조포사’역할을 했다. 1984년 현충원에 안장된 호국영령을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장사에서 약수 한 모금 마신 뒤 내려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간다. 아스팔트길이다. 조금 가다가 보면 현충원 정문으로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로 계속 가면 현충원 정문이다. 넓은 묘역에 묘비가 줄을 맞춰 서 있다. 묘비 하나에 꽃 한 다발씩 어김없이 놓였다. 대통령의 묘, 애국지사의 묘비, 한국전쟁에서 죽어간 영령들의 묘비와, 해외 참전 용사의 묘, 이름 없이 죽어간 무명용사, 학도의용군의 영령을 기리는 묘비와 탑까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 현충원. 묘비 앞 붉은 꽃송이가 하얀 눈 밭 위에서 더 붉게 빛난다.

서울 관악구 - 관악산의 품에 안겨 약동하는 사람 중심 도시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이 확장돼 경기도 시흥리, 독산리, 가리봉리, 신림리, 봉천리를 영등포구에 편입하고 새로 편입된 지역의 행정처리를 위해 출장소를 설치하면서 그 명칭을 ‘관악출장소’라고 불렀다. 관악출장소는 1968년 1월 폐지돼 영등포구의 직할로 편입됐다.

그러나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구간(區間)의 불균형이 심화되자 1973년 7월1일 이 지역은 영등포구에서 분리됐다. 영등포구 일부 지역과 함께 현재의 동작구·서초구 일부를 편입해 관악산 이름을 따 ‘서울특별시 관악구’로 신설된 것이다. 현재까지 관악구 지역의 지명을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서적은 [삼국사기]로 이 책의 지리지(地理誌)에 기록돼 있다.


천만 서울시민의 도심 속 쉼터-관악산 & 삼성산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솟아오른 산이 관악산이다.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불렸다.

높이 629m인 관악산은 북한산, 남한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이중으로 둘러싼 자연의 방벽으로서 옛 서울의 요새지를 이루었다.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에 속했던 산이다. 서울의 남쪽 경계를 이루고 있고 그 줄기는 과천 청계산을 거쳐 수원의 광교산까지 이른다. 북서쪽으로 서울대학교, 동쪽으로 정부 과천청사, 남쪽으로 안양유원지가 자리잡고 있다.

주봉은 연주대이며 산정의 영주대는 세조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산중에는 관음사, 연주암, 삼막사 등의 산사 등이 있다. 산정에는 기상청의 기상레이더 시설이 있다. 산세는 험한 편이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다 교통이 편하고 도심에서 가까워 많은 등산객이 찾는다. 매년 봄 철쭉제가 열린다. 숲이 울창하고 곳곳에 약수터가 있어 찾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삼성산은 관악산과 연계해서 등산하기에 좋은 산이다. 관악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서 우뚝 솟아 오른 삼성산은 바위로 된 암산이다. 원효대사가 의상, 윤필과 함께 삼막사란 사찰을 짓고 수도했다고 해 ‘삼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창건한 삼막사, 고려 태조 때 창건한 안양사, 그리고 염불암과 망월암, 반월암 등 많은 절과 암자가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 1  낙성대 공원 내에 말을 타고 호연지기를 뽐내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
  • 2  매콤한 맛으로 유명한 신림동 순대타운 내 순대곱창 볶음.
  • 3  서울에서 3번째로 문을 연 영어캠프인 관악 영어마을. 기존 캠프와 달리 소그룹 활동 위주의 맞춤형 프로그램을 자랑한다
  • 4  관악산 전경.


소음도 인적도 없는 그곳, 관악산 둘레길
관악산 둘레길은 사당역에서 출발해 관음사~낙성대공원~서울대~호암미술관 등에 걸쳐 총 13㎞에 이른다. 관악산 산기슭과 중턱을 오르내리며 수려한 자연 및 생태경관을 감상하는 한편 그 속에 숨어있는 역사·문화를 엮어 숲길 체험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또 관악산 제1광장(관악구 대학동 203번지) 앞에 위치한 호수공원은 부지면적 6,406㎡, 담수면적 2485㎡으로 97년 3월 준공됐다. 정자, 모교, 분수, 파고라, 석구상 및 시비, 화계 등이 설치돼 관악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 옆에는 관악산을 찾는 시민들이 짬을 내어 독서를 할 수 있는 ‘관악산 숲속 작은도서관‘이 위치하고 있다.


국립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http://www.snu.ac.kr/)는 1946년 8월에 대학원과 9개 단과대학으로 이루어진 국립대학으로 설립됐다. 1950~1960년대에는 6개 대학과 3개 전문대학원을 설립하는 등 확장기를 거쳐 1968년 서울대학교 종합화 10개년 계획이 수립돼 오늘의 관악캠퍼스가 건설됐다.

관악캠퍼스로의 이전은 1975년 대학원을 포함한 9개 단과대학(원)을 국제수준의 대학원 중심대학이라는 목표아래 ‘서울대학교 발전장기계획(1987~2001)’ 수립, 1995년에는 ‘서울대학교 2000년대 미래상’을 공표하는 등 이의 실천을 위해 최상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제 세계화·지식정보화의 21세기를 맞이해 서울대학교는 세계 수준의 종합연구대학으로 도약, 학문·기술·문화 등 지식기반사회의 핵심영역에서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인재를 배출하고 세계수준의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내에는 ‘십칠사찬고금통요’를 비롯한 5종의 국보와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등 8종의 보물 등 수많은 서적을 소장하고 있는 규장각, 국내 최초의 대학미술관으로 2006년 개관한 서울대학교 모아미술관이 있다.


맞춤형 영어교육시설, 관악 영어마을
기존시설을 리모델링해 개관한 풍납, 수유캠프와는 달리 2010년 4월 1일 서울시에서는 처음으로 영어교육에 맞게 설계하고 건립된 맞춤형 영어교육시설이다. 서울영어마을 관악캠프는 2만 391㎡ 규모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7040㎡규모로 약 30여개의 체험실 및 소그룹 활동실이 있고, 정보화시설이 갖춰진 도서관은 물론 인근 관악산 및 낙성대공원 등의 자연친화적 교육환경을 갖추고 있다.

기존의 영어마을이 공항 출입국 수속, 병원 이용 등 상황에 맞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교육내용이 주로 구성됐다면 관악캠프(gwanak.sev.go.kr )는 생태계 관찰, 크로마키 기법을 활용한 Blue Screen 등 참가자의 적성에 맞는 소그룹 활동을 활용한 창의적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기존 영어마을의 합숙교육과는 달리 통학형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해 이용비용의 절감과 이용대상의 확대를 추구했다.


가볼 만한 미술관&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seoulmoa.seoul.go.kr)은 1977년 11월 12일 사적 제 254호로 지정된 문화재 건축물이다. 전체적으로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적절히 사용해 발코니의 이오니아식 석주와 어울리는 단아한 고전주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1905년부터 벨기에 영사관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1층과 2층에 총 11개의 전시실이 갖춘 시립미술관으로 새롭게 꾸며져 운영되고 있다. 연중 무료로 운영되는 다채롭고 수준 높은 기획전시와 도심 속에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고전적인 건축물과 현대미술이 소통하는 예술적 공간이다.

또한 미성동에 위치한 호림박물관은 윤장섭 선생이 출연한 유물과 기금을 토대로 설립됐다. ‘호림(湖林)’은 윤장섭 선생의 아호(雅號)다. 1981년 7월 성보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이어 1982년 10월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에 호림박물관(湖林博物館)을 개관했다. 그 후 1996년 3월 관악구 신림동에 박물관을 확장·신축해 1999년 5월에 재개관했다.

신축한 호림박물관(http://www.horimmuseum.org/)은 연건평 1400평 규모의 지하1층 지상 2층의 건물에 4개의 상설 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 야외전시장, 수장고 등 전시 관련시설과 커피숍, 기프트숍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토기(3,000여 점), 도자기(4,000여 점), 회화전적류(2,000여 점), 금속공예품(600여 점), 기타(400여 점) 등 1만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 중 44점의 유물이 국가문화재로 지정(국보 8점, 보물 36점) 돼 국내외에서 소장품의 다양성과 질적인 면에서 주목 받고 있는 박물관이다.


고려 명장 인헌공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
낙성대공원은 고려 때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친 귀주대첩의 영웅 인헌공 강감찬 장군(948∼1031)의 탄생지(관악구 인헌동 228번지)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1973년 서울시가 장군의 슬기와 용맹을 국가 안보의 의표로 삼고자 출생유적지를 정화하고 사당과 부속건물을 신축했다. 당초 봉천동 218번지에 있던 석탑을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옛터에는 따로 유허비를 세워 사적지임을 표시했다.

낙성대공원 동쪽에 ‘안국사’라는 사당을 지어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정면에는 외삼문인 안국문과 내삼문을 세웠으며 문 안에 낙성대 탑을 옮겨와 안치했다. 또 탑 맞은편에는 사적비를 세워놓았다. 안국사는 고려시대 목조건축양식의 대표 건물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본따 세웠으며 정면 5간, 측면 2간의 팔각 청기와 지붕이 올려져 있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신림동 순대타운
신림동 순대타운은 약 300여개의 크고 작은 상가들이 모여 있는 관악구의 대표적인 먹거리 타운으로 순대집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아예 건물 전체가 모두 순대집인 것들도 몇 개가 있다. 집집마다 맛의 차이는 있지만 ‘순대 곱창 볶음’은 특유의 매콤한 맛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 신림사거리 상권의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20여년간 제대로 된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최근 칙칙한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화강석으로 산뜻하고 쾌적한 보행환경을 제공하는 한편 많은 전주와 늘어진 전선들로 사람들의 시야를 갑갑하게 했던 중앙로에 전선 지중화사업을 병행했다. 또한 루미나리에 야간경관 시설물을 설치하여 특색 있는 밤거리를 연출하는 등 1년여의 종합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2010년말 새로운 모습으로 말끔하게 단장됐다.

터키 파묵칼레 - 하얀 온천지대와 고대 유적의 만남


귀에 익숙한 터키의 3대 명소를 꼽으면 이스탄불, 카파도키아, 파묵칼레쯤 되겠다. 이스탄불이 동, 서양 문물의 교차로 성격이 짙다면 카파도키아는 특이한 자연지형으로 명함을 내민다. 규모는 다소곳하지만 파묵칼레의 성향은 좀 색다르다. 석회층으로 이뤄진 터키 남서부의 온천지대는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어우러진다. 석회층은 세계자연유산으로, 로마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이런 복합 세계 유산은 전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다.

언덕 위 온천 수영장에서는 고대 로마 유적 사이를 헤엄치는 독특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목화의 성’. 파묵(목화), 칼레(성)에 담긴 의미다. 하얀 온천지대 하나만으로도 독특한 풍경이다. 터키 현지인들이 아름다움을 비유할 때도 파묵칼레(파무칼레, Pamukkale)가 종종 등장한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이해가 간다. 생긴 모습은 흡사 계단식 다랭이논을 닮았다. 소금가루를 겹겹이 쌓아놓은 듯 하얀 석회층이 절벽 한 면을 빼곡히 채운다. 돌무쉬(Dolmus, 미니버스)를 타고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빙산이나 설산 같다. 석회를 머금은 물이 흘러내리면서 그 성분들이 층을 이뤘고 층마다 푸른 물을 머금고 있다. 맑은 날이면 석회층은 물과 함께 청아하게 빛난다.
 
계단식 논을 닮은 파묵칼레의 석회층.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온천에 발을 담그다

이 석회층들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색이 변한다. 푸르던 물은 희게 변색되며 해 질 녘에 띠는 색깔은 붉은빛이다. 그렇기에 두세 시간 석회층과 인근 유적만 둘러보고 훌쩍 떠나는 것은 삼가는 게 좋다. 마을 사람들이 즐겨 찾는 대중 온천에서 발을 담그며 현지인들과 미소도 나눠 보고. 겉은 딱딱하고 속은 말랑말랑한 터키빵 에크멕도 인근 시장 골목에서 제대로 맛봐야 한다. 그렇게 노닥노닥 보낸 뒤 파묵칼레가 시간에 따라 빚어내는 색의 마술을 감상하면 좋다.
 
파묵칼레 시장에서 빵을 굽는 할머니.
파묵칼레 마을에 머물며 현지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예전에는 석회층에서 직접 몸을 담그며 목욕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뒤에는 목욕은 금지됐고 입구에서도 신발을 벗어야 일부 구간에 들어설 수 있다. 원천수의 온도는 대략 섭씨 35도. 생긴 것은 빙산처럼 보여도 발끝에 젖어드는 감촉은 따사롭다. 온천 분위기 내려고 수영복 차림으로 오가는 청춘들도 있고 석회층에 걸터앉아 멍하니 사색에 잠기는 여행자들도 있다.

전 세계를 둘러봐도 색감 있는 온천으로 유명세를 탄 여행지는 드물다. 코스타리카의 아레날 화산 인근은 노천 계곡물이 온천수였고, 헝가리 부다페스트 역시 왕궁 같은 건물 안에 온천이 들어서 있다. 그래도 주연보다는 조연의 성격이 짙었는데 파묵칼레는 온천이 당당하게 주인공이다.

카클르크 동굴 앞 광천수에서 헤엄을 치는 어린 꼬마.


온천의 유래를 살펴보면 몇몇 유럽의 온천과 태생이 유사하다. 부다페스트의 온천이 한때 헝가리를 지배했던 로마인에 의해서 개발됐듯 파묵칼레 역시 로마황제들이 망중한을 즐겼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클레오파트라가 방문했다는 설도 있다. 산화칼슘이 함유된 온천은 신경통에 좋아 당시 돈 많은 부유층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고대 목욕탕의 흔적 ‘히에라 폴리스’
온천의 역사를 반증이라도 하듯 석회층 언덕 위에는 고대 로마 유적들이 남아 있다. 히에라폴리스로 불리는 로마 유적은 기원전 2세기 페르가몬 왕조의 터전이었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성스러운 도시를 뜻하는 ‘히에라폴리스’로 불렸고 한때 인구 8만에 이르는 큰 도시였으나 전쟁으로 인해 11세기 이후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히에라 폴리스에는 1,000여 개의 석관묘가 늘어서 있다.
고대 로마 유적은 폐허가 된 뒤에 발굴됐지만 그 잔상을 또렷하게 남아 있다.


1350년대 대지진으로 사라졌던 도시는 19세기 발굴작업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원형극장, 공동묘지, 목욕탕 등은 폐허가 된 채 넓게 흩어져 있다. 1,000여 개의 석관이 남아 있는 고대 공동묘지는 터키에서 가장 큰 규모인데 목욕탕과 어울려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 석관들이 치료와 휴양을 위해 몰려들었던 병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대리석 기둥으로 채워진 옛 목욕탕은 현대에도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 후예들은 폐허가 된 유적지에 온천물을 담아 언덕 위에 온천 수영장을 만들었다. 수영장 밑바닥에는 무너진 거대한 기둥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주변은 카페처럼 꾸며져 있다. 고대 로마 시대의 황제들이 온천에서 즐겼던 풍류를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제2의 파묵칼레로 불리는 카클르크 동굴.


파묵칼레 인근에는 또 다른 온천 명승지도 자리 잡았다. 제2의 파묵칼레로 불리는 카클르크(카크리크) 동굴은 최근에 발견된 종유동굴로 동굴 안에서 광천수가 뿜어져 나온다. 카라하우트(karahayit)로 불리는 휴양지 역시 온천 숙소들이 밀집돼 있다. 최근에는 파묵칼레의 훼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온천 호텔들이 무분별하게 들어서면서 온천수는 고갈되고 푸르고 흰 석회층은 누렇게 변색되고 있다. 쇠락의 길을 걸었던 고대 로마의 잔상은 파묵칼레에도 투영되는 듯 애잔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가는 길파묵칼레는 터키 남서부 데니즐리 주에 위치했다. 인천에서 이스탄불까지는 직항편이 오간다. 이스탄불에서 데니즐리까지 항공으로는 1시간 10분 소요된다. 버스 등 대중교통으로는 10시간가량 걸린다. 데니즐리 터미널에서 파묵칼레행 미니버스가 운행된다. 작은 호텔이나 숙소는 파묵칼레 마을에 들어서 있으며 리조트, 호텔 등은 카라하우트 쪽이 많은 편이다.

통영 수하식 굴 - 입 안 한 가득 바다 향

굴은 조간대에서 자란다. 조간대란 개땅이 간조 때는 바깥에 노출되고 만조 때는 바닷물에 잠기는 구역을 말한다. 물이 나면 굴은 바깥에 노출이 되니 채취하기가 쉽다. 따라서 굴은 오랜 옛날부터 쉽게 얻을 수 있는 음식이었으며, 그 흔적으로 선사시대의 패총이 한반도 곳곳에 남아 있다. 굴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법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굴은 돌이나 나무 어디에든 잘 붙어 자라므로 바닷가에 돌이나 나무 따위를 넣어 굴을 붙여 키웠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방식의 굴 키우기가 있었다 한다. 통영의 수하식 굴은 바다에 부표를 띄우고 그 아래에 굴을 붙인 조가비를 길게 늘어뜨려 키운다. 대량 생산을 위한 방법이다.
  • 1  2년 자란 수하식 굴이다. 투석식이나 지주식에 비하여 굴이 크다. 한 입 가득 찬다.
  • 2  수하식 굴을 채취하는 선박이다. 해가 뜨면서 굴 거두는 일이 시작된다.
  • 3  굴 까는 일은 손으로 한다. 김이 나는 바가지에는 따뜻한 물이 담겨 있다. 손을 녹이기 위한 것이다.


수하식 굴의 장점
굴을 키우는 방법은 여러 종류가 있다. 먼저, 투석식이다. 개땅에 돌멩이를 던져넣어 이 돌에 굴을 붙이는 방법이다.(네이버캐스트 '간월도 자연산 참굴' 참조) 이 투석식 굴은 자연산과 마찬가지라고 봐야 한다. 투석식과 비슷한 고전적인 방법으로 지주식이 있다. 지주식은 조간대에 기다란 나무를 박아 굴을 붙여 키운다. 최근에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수평망식이라는 방법이 일부 시도되고 있는데, 조간대에 평상을 펴서 그 위에 굴을 키운다. 또, 조간대에 덕장 같은 나무틀을 만들어 굴줄을 거는 간이 수하식이 있다. 이상의 방법들은 대부분 간조에는 굴이 바깥에 노출된다. 자연산 굴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수하식은 바다 위에 부표를 띄우고 어린 굴이 붙은 줄을 바다에 내려 키우니 굴이 바깥에 노출되는 일이 없다. 이 굴 키우는 방법의 차이로 인해 굴의 맛이 달라진다. 물론 자연 상태에 가까운 환경에서 키우는 굴이 더 단단하고 향이 짙다. 통영의 어민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수하식 굴의 장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굴이 크게 자란다는 점이다. 굴 하나의 크기가 10그램 내외이다. 한 입 가득 바다의 향을 삼키는 즐거움은 수하식 굴에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양식은 아니다
자연산 굴 외는 흔히 '양식 굴'이라 한다. 정확히 보자면 바른 말이 아니다. 양식이란 인공으로 부화를 하고 사료를 먹여 키우는 것을 말한다. 일부는 인공으로 굴의 부화를 도와 채묘를 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연의 굴 유생을 조가비에 붙이며, 또 굴을 키우는 과정에서 사료를 주는 일이 없으니 양식은 아니다. 통영의 어민들은 '수하식 양식 굴'이 아니라 그냥 '수하식 굴'로 불리기를 바란다. 국내의 수하식 굴은 1960년께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까지는 조간대가 넓은 서해안에서 투석식, 지주식으로 주로 키웠는데, 이 수하식이 남해에 들어오면서 굴 주산지가 바뀌었다. 특히 통영 앞바다에서 수하식이 많으며 이 바다에서 국내 생산량의 80% 정도를 감당한다. 일본 수출도 많이 한다.


2년 자란 것이 맛있다

수하식 굴 키우기는 굴을 붙이는 조가비 엮는 작업이 그 시작이다. 4~5월 봄에 이 일을 한다. 7.5미터에 이르는 긴 줄에 6.5미터 길이까지 조가비를 끼운다. 조가비는 가리비나 굴의 것을 쓴다. 가리비의 조가비는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을 하기도 한다. 굴은 6~8월에 산란을 하는데, 이 시기에 굴의 유생을 조가비에 붙인다. 바다에는 굴의 유생이 대량으로 떠돌아다니는 때를 맞추어 조가비를 엮은 줄을 바다에 내리는 것이다. 이를 채묘라 한다. 굴의 유생이 붙은 '조가비줄'은 이제 '굴줄'이 되어 부표에 걸린 긴 줄 위에 묶여 바다에 내려진다. 굴줄은 40센티미터 간격으로 묶이는데 긴 줄 하나의 길이는 100미터에서 200미터에 이른다. 이렇게 채묘한 굴은 두 번째 겨울에 거둔다. 햇수로 2년 만에 거두는 것이다. 깐 굴의 크기는 보통 8그램 이상이며 큰 것은 12그램 정도이다. 채묘한 당해 겨울에 거두는 굴도 있다. 이런 굴은 4그램 정도로 잘다. 그런데 가격은 더 비싸다. 굴을 까는 데 힘이 더 들기 때문이다. 맛은 2년치의 큰 굴이 낫다.


바다의 일, 사람의 일

통영의 바다는 부표로 인하여 하얗다. 대부분 굴의 부표이며, 멍게의 것도 있다. 새벽 동트기 전에 운반선을 몰고 이 하얀 바다로 나가 굴을 거둔다. 2년간 바닷물에 담겨 있던 굴줄이 올라오면 그 줄을 끊고 드럼 세탁기 같은 통을 돌려 굴만 솎아낸다. 한나절이면 운반선에 굴이 가득 찬다. 여기까지는 남자의 일이다. 운반선으로 옮겨진 굴은 굴 까는 작업장에 부려진다. 여자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굴을 깐다. 새벽 5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5시까지 작업을 하는데, 품삯은 굴을 깐 양에 따라 정해진다. 이 굴은 세척과 포장 과정을 거쳐 굴수하식수산업협동조합에서 경매를 거쳐 전국의 시장에 흩어진다. 굴을 키우는 것은 자연의 일이지만 그 환경을 조성하고 거두어 먹을 수 있게 하기까지 온통 사람의 노동이 거쳐야 한다. 그래서, 굴이 간간한 것이다.